부디... 님아

[스크랩] 노무현!! 당신은 바보입니다<님의 발자취 옮깁니다>ㅠㅠㅠ

우수영 2009. 12. 12. 13:13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5시 45분께 경호관 1명과 함께 사저를 나와 마을 뒷산인 봉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오전 6시40분께 봉화산 중턱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다.
부엉이 바위는 사저 뒷편에서 경사 40도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오른 해발 100여m 지점에 있다.
봉하마을에서 ‘사자바위’로 불리는 봉수대에(해발 130)서는 440 정도 떨어져있고, 봉화산 정토원과도 250 정도 떨어져 있다.

노 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을 때 동행했던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경호관이 “가져올까요”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은 “가지러 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측의 한 관계자는 또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바위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 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담담하게 얘기했다고 당시 근접 경호를 했던 경호관이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곧바로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으며, 경호관이 즉각 호송 조치를 한 뒤 이를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비서진과 경호원 등에 의해 승용차편으로 오전 7시께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노 전 대통령을 처음 진료한 이 병원 손창배 내과과장은 “노 전 대통령이 의식불명 상태에서 병원에 도착했고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손 과장은 또 “노 전 대통령은 구급차가 아닌 경호실 차량으로 비서진 등에 의해 병원에 도착했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손 과장은 “노 전 대통령은 머리 부분이 심하게 다쳐 손상된 상태”였다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병원 구급차에 응급팀을 동승시켜 상급병원인 부산대 양산병원으로 후송했다”고 밝혔다.

오전 7시35분께 세영병원을 떠난 노 전 대통령은 오전 8시13분께 부산대병원에 도착,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오전 9시30분에 서거했다.
백승완 양산 부산대병원장은 브리핑을 통해“뇌좌상이 확인됐는데 두부 손상이 직접 사인으로 확인됐다”면서 “이외에도 늑골 골절, 골반 등 전신에 다발성 골절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백 병원장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실에 도착했으나 이미의식이 없고 자가호흡도 없는 상태였으며 머리 부문에 11㎝ 정도 찢어진 상처가 발견됐다.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회복이 안돼 오전 8시 30분께 중단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과 부산대병원장은 이날 오전 11시 노 전대통령의 공식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전 대통령은 23일 자살을 결행하기에 앞서 "너무 힘들었다"며 극심한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가족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닌가. 화장해달라.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워달라"는 내용의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英鉉)와 둘째형 건평씨(建平?구속),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씨(英玉)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년 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됐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진영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서민 가정에서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그는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만에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 변론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점차 인권변호사로 인식됐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에서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당시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뒤 검찰의 불만을 받자 검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했지만 오히려 불신이 깊어졌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재임기간 중에는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뇌출혈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출처 : 해남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소다 이외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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